시와 세상의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해온 시인 장석주가 [시인의 시 읽기―누구나 가슴에 벼랑 하나쯤 품고 산다]를 들고 나왔다. 평론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등 그를 수식하는 많은 말 중에서도 시인이라는 말이 마치 호(號)처럼 그의 이름 앞에 따라 붙는 이유는 그가 시와 시인,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무단히도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번 책은 2007년부터 아홉 해째 조선일보 [톱클래스]에 연재해온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를 엮은 것으로 시인이 시를 향해 내쉬는 긴 호흡이 삶을 연명하는 호흡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증명한다. 총 90여 편의 연재물 중 삶과 죽음, 인생을 노래한 시 30편으로 묶어낸 이번 책은 어떤 철학서도 주지 못한 삶에 대한 통찰과 어떤 심리학서도 주지 못한 가슴 깊은 위로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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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곧게 펴고 시를 읽는다는 일
1장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육탁(肉鐸)_배한봉
울음이 타는 가을 강_박재삼
강_황인숙
운동장을 가로질러간다는 것은_유홍준
후회에 대해 적다_허연
껌_김기택
별을 보며_이성선
공(球)_박판식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_이수명
수선화에게_정호승
2장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_정진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_조용미
가을_김종길
풍장 1_황동규
나 떠난 후에도_문정희
꿈 밖이 무한_유안진
저무는 빛_홍영철
녹슨 도끼의 시_손택수
나무의 기척_김광규
문의마을에 가서_고은
3장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밀물_정끝별
밀가루 반죽_한미영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_박철
목요일마다 신선한 달걀이 배달되고_이근화
어떤 하루_강기원
너와집 한 채_김명인
쏘가리, 호랑이_이정훈
밤의 그늘_이향
갈현동 470-1번지 세인주택 앞_이승희
물소리를 듣다_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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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아는 나이, 비로소 시를 읽다
생의 바닥을 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당신에게 드리는 시 30
고은, 정호승, 문정희, 정끝별, 배한봉……
좋지 않은 세상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 30인의 시와 해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 '배한봉, [육탁]' 중에서)
새벽 어판장 바닥에서 제 몸 다치는 줄도 모르고 온몸으로 제 몸을 일으키는 고기, 그리고 그 모습에 겹쳐지는 아버지의 삶. 뼈가 휘는 수고와 노동을 감당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노고를 향해 이보다 꾸밈없는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술 권하는 사회에서 자본 권하는 사회로 들어선 이 시대 흔들리는 가장의 검게 그을린 속은 그 어떤 암흑에 비할 수 없다. 내보일 수 없는 그들의 외로움과 시림은 뼛속까지 식초보다 더 아프게 내려온다. 이제 희망보다는 허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지리멸렬한 중년의 인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의 극한 속에서 다시 한번 희망을 찾아낸다. 끓는 물도 100도가 넘지 않으면 주전자 뚜껑을 들어 올릴 수 없듯이, 시는 절망이 지니고 있는 자기 회복의 힘을 이야기한다. 삶이 우리를 배신한다 해도 살아봐야 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살아야 할 가장 숭고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육신
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
(/ '정진혁,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중에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사람은 고작해야 시간의 시체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찾아오는 삶과 죽음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어느 날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허황된 시도들은 이제 한 풀 꺾여 장수(長壽)라는 타협 선을 찾았으나 삶은 여전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고, 시간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육신은 이제 시간 앞에 먹잇감으로 던져져 손목의 시계가 없이도 온몸으로 그 시간의 흐름을 증명한다. 시간은 어머니의 귀와 눈을 먹어치웠고 매일 돌아오는 식사 시간처럼 같은 시간에 어머니의 발목과 무릎까지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를 깨달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시간의 먹잇감이 된 후다. 시간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시를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의 생물학적 운명과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함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정끝별, [밀물]' 중에서)
시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은 뒤 비로소 얻은 평화로운 시간에 위로의 인사를 건넨다. 하루의 피로와 수고를 보듬는 이 말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 끝에 꼭 들어맞는다. 이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세상의 진부한 악에서 도망쳐온 '사람꽃'에 보내는 찬사다. 저마다 그 향기를 잃지 않기 위해 꿋꿋이 버텨내는 이 꽃들 사이에 사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시는 삶과 불가분의 관계다. 시인 자체가 세상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곳에 함께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양분이 되어준다. 그렇기에 시인이 시에 담은 세상은 우리가 처절하게 견디고 감사함에 안도하는 그 세상이다. 청소하고 빨래하는 주부의 하루부터 사람 좋은 무능력한 가장의 멋쩍은 웃음, 속세를 등지고 물욕을 저버린 자의 평화로운 한때까지 시가 서로 다른 삶을 담은 듯해도 결코 공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다.
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한 묶음의 언어
수신 확인조차 되지 않는 손 편지에 제 마음 대신하는 시 한 편 베껴 전달하고, 공중전화 박스 속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못다 전한 말 있을까 심장도 함께 내려앉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추억 속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미 빠른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과거의 삶이란 추억하고는 싶지만 돌아가기에는 두려운 지점이다. 기다림이 주는 설렘은 속도가 주는 즉각적인 해소 앞에 잊혀진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 세상의 속도에 비켜서 우리의 삶을 꾸준히도 그려내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들은 세계가 만든 가난을 횡단하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삶의 모양들을 문자로 기록한다. 여기에는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이 내뿜는 차가운 온도와 시간에 먹혀 작아져버린 사람의 몸집과 수고로운 하루에 건네는 위로의 인사가 담겨 있다. 시는 우리가 무심코 잊고 있을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고 현재 속에 과거의 자리를 무단히도 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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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서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뭔가에 열광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꾀어 어딘가로 데려가는 전설 속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열광하지 않게 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이에 감탄하고, 발견과 창조의 기쁨에 예민한 자기 안의 어린아이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우리는 호기심을 잃고 더 자주 통제하는 뇌에 지배당한다. 점점 더 관습과 규범에 종속된 채 밥벌이에 매달리는 나이 먹은 영장류의 둔중함에 빠져버린다.
우리는 살아봐야 한다. 나날의 삶이 희망을 배신한다 해도, 이 도시에 낭패를 당한 천사,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만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살아봐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살아야 할 가장 숭고한 이유다. 우리는 삶이라는 만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슴에 벼랑을 하나쯤 품고 산다. 나무가 제 속에 도끼를 품고 번개를 품고 살듯이. 벼랑을 품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낫냐는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잘 살아내는 것이다.
외로움의 본질은 타자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기 안의 충만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를 바라봄이다. 외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독일어 ‘einsam’는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외로움은 사람의 무리에 종속되지 않고 자의식의 주체로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누리는 감정이다. 분명한 것은 외로움의 한 본질이 매우 독립적인 기질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속에서 살 수 없지만 피로 속에서는 살 수가 있다. 피로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고갈에서 비롯된 정신적 체감(體感)의 문제다. 피로의 출현은 갑작스런 것이 아니고 한없이 느리게 이어지는 것이다. 피로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지만 피로 때문에 불행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피로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말대로 “불행 가운데 가장 대수롭지 않은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란 대수롭지 않은 작은 불행들을 무수한 잎으로 매단 나무가 아닌가!
진부한 악에 기어코 빠지지 않은 갑과 을은 저마다 현실의 토대에 뿌리를 내린 귀한 ‘사람꽃’이다. 이 꽃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향기를 풀어낸다. 궁지에 몰리더라도 그 어려움을 꿋꿋하게 감내하며 결코 야수로 변하지 않는 이 꽃들 사이에 사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집은 사람이 장소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들의 중심 공간이다. 어둠 속에서 불빛을 머금고 있는 집은 주거 공간이자 세속의 거친 노동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침묵과 평온으로 맞아주는 은신처다. 집은 존재의 요람이고, 나날이 이루어지는 삶의 의미를 갱신하는 자궁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토대를 이루는 근원 공간이다. 집은 피로와 수고로 고갈된 생명에게 약동하는 힘을 충전시키고, 덧없고 무미건조한 삶을 기쁨과 의미의 삶으로 탈바꿈시키는 거의 유일한 지상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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