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도재경 소설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과 함께 이야기를 침착하게 풀어나간 서술력”(김화영 문학평론가․한수산 소설가)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은 데뷔작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를 비롯하여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2020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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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
별 게 아니라고 말해줘요
멕시코 해변에 내린 첫눈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분홍색 고래
홈
피치카토 폴카를 듣는 시간
발문 : 별 게 아니라고 말해줄게요_임현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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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역사 속에서 사연을 찾고 사건 속에서 사람의 일상을 찾아 쓰는 일. 별 일을 별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시시하게 사라져버린 소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고 빛을 비추며 이야기로 새롭게 삶을 부여하는 일. 누가 부탁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은 이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한 문장씩 써내려가는 소설가의 삶. 도재경의 소설을 한 편씩 읽어갈 때 잊고 있었던 이 일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다시금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읽는 것을 넘어 목소리로 들리는 문장. 기억되는 것을 넘어 마음에 새겨지는 이야기. 이 근사한 책을
- 정용준 / 소설가
도재경 소설가의 작품들은 미래의 현재화 속에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현재에 미래적 이상의 빛을 옮겨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그의 작품들은 현재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류적 역사나 믿음 같은 것들이 긴 지구적, 우주적 시간 속에서 보면 한갓 짧은 지배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그는 소설이 어떤 주제 이전에 그만의 색채를 갖춘 문체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이다. 치열한 작가적 의식을 갖춘 그가 앞으로 한국소설의 새로움을 이끌어낼 새로운 장을 기대해마지 않는다.
- 방민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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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도재경 소설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과 함께 이야기를 침착하게 풀어나간 서술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김화영 문학평론가․한수산 소설가)이라는 평을 받은 데뷔작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를 비롯하여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2020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읽는 것을 넘어 목소리로 들리는 문장.
기억되는 것을 넘어 마음에 새겨지는 이야기.
_정용준(소설가)
“그땐 사는 게 더 거짓말 같았으니까.”
도재경은 무엇보다 먼저 인물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골몰한다. 「피에카르스키를 찾아서」에서 ‘나’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박 류드밀라’를 인터뷰하게 된다. 강제 이주정책의 당사자이기도 한 그녀가 수집해온 기록물과 증언은 ‘나’의 작업에 도움이 되지만 ‘피에카르스키’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또 독자들은 박 류드밀라의 기억에 근거해 ‘피에카르스키’의 족적을 좇는 일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분홍색 고래」에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듣는 일은 이어진다. 이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아흔을 넘긴 노인이다. 그는 기억 속에서 축지법을 구사하며 역사 속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신뢰할 수 없는 말이라 여기고 기록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나’와 달리 함께 구술사 기록 작업을 하는 ‘윤주 선배’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인물도 있다. 「홈」의 화자인 ‘나’는 게임회사의 콜센터에서 일하던 어느 날 ‘팜’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고객의 전화를 받게 된다. ‘나’는 상담을 핑계로 종종 전화를 걸어 생뚱맞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팜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맡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이야기를 최대한 자신의 논리로 재조합해 해결책을 제시해보려고 시도한다. ‘나’는 어차피 “게임일 뿐”인 세계에 세뇌되어버린 듯한 팜을 끄집어내려고 하지만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팜의 이야기를 제대로 인식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다만 삶을 게임으로 치환해버린 듯한 남자와는 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뿐이다.
과거를 재구성하며 미래를 앞당기는 이야기들.
도재경은 망각으로부터 시작된 증언 과정을 재현하며 이야기를 듣는 자에게 요구되는 연대적 책임에 주목한다. 곧,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미 기록되고 완료된 이야기가 아니라, 잡다하고 불필요한 사연이 가득한 구술된 이야기를 통해 기억의 흔적을 드러낸다. _임현(소설가)
도재경 소설가의 작품들은 미래의 현재화 속에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현재에 미래적 이상의 빛을 옮겨온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그의 작품들은 현재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류적 역사나 믿음 같은 것들이 긴 지구적, 우주적 시간 속에서 보면 한갓 짧은 지배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_방민호(문학평론가)
지나간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다. 죽은 친구가 게임 속에 남겨놓은 버그를 좇아가는 이야기(「멕시코 해변에 내린 첫눈」)나 최치원의 미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학자의 이야기(「사랑이라고 말하지만」)에서는 저마다가 발견한 사실을 통해 진실을 발명해내고 그것을 믿기로 한다.
각 작품들은 인물들의 증언이나 구술로 전달되는 이야기가 얼마만큼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서 때로는 단호한 결말을 내리지 않고 끝이 나면서 확고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조금씩 의심해보게 된다. 이러한 작품 속 태도는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기도 하는데 과거 역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에 귀 기울이며 어떻게 받아 적는가에 따라 과거는 다른 모습을 띨 수 있고 그를 통해 원하는 미래를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재경 작가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사건들에게 빛을 비추며 이야기로 새롭게 삶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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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쳤었나봐요?”
_ 「별 게 아니라고 말해줘요」 중에서
“네?”
뤽은 무심히 여자의 오른손에 도드라진 흉터를 가리켰다.
“아, 별거 아니에요.”
여자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뭐든 아물고 나면 그렇긴 하죠.”
뤽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놓고 앉았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요.”
앤디, 그거 알아? 자네, 내가 아는 사람과 꼭 닮았다는 걸. 갈매기 한 마리가 창틀에 내려앉았다. 앤디는 손가락으로 갈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변으로부터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들렸다. 갈매기는 부리로 깃털을 고르더니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어니는 앤디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바다에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얀 깃털 하나가 앤디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_ 「멕시코 해변에 내린 첫눈」 중에서
축제가 시작될 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팜이 있는 저편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조금은 사무적인 어조로 저편의 고객을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연이은 총성이 귀를 때렸다.
_ 「홈」 중에서
팜?
총성은 금방 멎었지만 저편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가슴이 콩닥거렸다.
김영호 씨는 별안간 울음을 토해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윤주 선배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들썩이는 그의 굽은 어깨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작은 아이 같았다.
_ 「분홍색 고래」 중에서
그날 인터뷰는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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