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힘들게 살려고 결혼한 게 아니었다. 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꿈이 뭐냐고 학교 선배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생각 없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라고 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꿈이 있긴 있었던 것인가? 장난삼아 큰딸과 말했던 꿈이 생각났다. 그동안 힘들게 살아서 그런지 큰딸의 꿈은 건물주 2세가 되는 것이란다. 내가 흔쾌히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했다. 큰딸의 꿈이 나의 꿈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내 노후를 스스로 책임질 돈 공부. 그렇게 나의 은퇴 돈 공부는 시작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새로운 직장을 찾아 이력서를 내밀면서 알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없었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다는 것과 경력단절인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업장은 없다는 것을. 경력단절된 나를 받아주는 직장이면 감사히 생각했다. 그나마 나를 받아주었던 회사도 임금을 제때 주지 않았다. 임금체불 직장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도와주는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상담받게 되었다. 센터에서는 경력, 학력, 자격증을 업그레이드하라고 조언해줬다. 일하면서 방송대 교육학을 전공하여 학력을 키웠고,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활용능력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몇 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일 경험도 쌓이게 되었다. 주부, 학생, 직장인으로 1인 N역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고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인 내가 다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15년간 몸담아 밤낮없이 일했던 직장에서 어느 날 아침 지방 발령을 받은 적이 있다. 생각하면 그해도 내 인생에 있어 손꼽히게 힘든 한 해였다. 장애인 시설 원장으로 일하던 때였다. 시설에 문제가 있어 몇 달을 수습하느라 집에도 못 가고 정신이 없었다. 그해 여름엔 발목 수술을 해서 8주간 목발을 짚고 출퇴근 했다. 가을엔 친정아빠가 돌아가시고 12월엔 시설 공사를 했다. 한 해 많은 일이 생겼고 너무 힘들었다. 그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2월 중순 갑자기 지방 발령 통지를 받았다. 법인이 생긴 이래 타당한 연유 없이 연고지 이외 지역의 발령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간신히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라 걷기도 자유롭지 않았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시기라 엄마가 집에 없으면 안 되었다. 부당하다고 생각된 인사발령에 불응하여 변호사도 만나고 노무사도 만나 상담을 받았다. 소송에서 이길 확률이 50% 정도라 했다. 직원이 아니고 원장이기 때문에 고용자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개인으로 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법적 도움으로 내가 이길 승산이 100%는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한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내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송 준비에 들어갔다는 헛소문까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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