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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처럼 사랑하고 세네카처럼 현명하게

윤지원
유노책주

책속에서

니체는 스위스의 실바플라나 호반을 산책하다가 이 세계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개념인 ‘영원회귀(영겁회귀)’를 생각해 냅니다. 세계의 물질량이 보존되고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똑같은 원자의 조합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 회에 걸쳐 반복된다는 개념입니다.
니체에게 역사는 진보나 전진 없이 원환 운동을 하며 시간 속에서 변화할 뿐입니다. 무한한 시간이므로 과거에도 몇 번이나 반복됐을 것이고 앞으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일어날 조합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삶이 힘들고 고난이 가득해도 어차피 반복될 예정이라면 영원히 반복되는 내 운명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기 위해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운명을 개척하고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운명의 신이 저주하는 것 같은 순간을 만날지라도 어떻게든 이겨 내고 극복하라고 말합니다.
<운명을 사랑하는 법: 니체의 위버멘쉬>에서

부버는 나와 남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나’와 ‘그것’인지 ‘나’와 ‘너’인지로 말이죠. 즉, 남은 나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그것’으로 존재할지, 아니면 ‘너’로 존재할지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경험과 이용, 수단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그 누군가는 ‘나’에게 ‘그것’이 됩니다. 비인간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온전히 존재로 바라보고 인간적으로 대하면 그때의 상대방은 나에게 ‘그것’이 아니라 ‘너’가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나와 그의 관계는 ‘나-너’가 되기도 하고 ‘나-그것’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너’의 진실된 만남을 지향하자고 주장합니다.
<공존의 대상으로 타인을 보는 법: 부버의 참된 만남>에서

그는 이러한 맹목적인 의지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인류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존재가 지닌 의지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의 의지와 충돌합니다. 사회가 계속 진보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지라도, 개인이 느끼는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인생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이 삶의 본질이고 행복은 고통이 일시적으로 부재한 상황입니다.
맹목적인 의지, 즉 욕망은 밑이 깨진 독처럼 아무리 충족시켜도 해소되지 않습니다. 욕망을 충족했을 때 오는 만족감은 일시적이며, 곧 권태라는 이름만 다른 고통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결핍과 권태를 오가며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인생이 왜 고통이라는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연민>에서

레비나스는 자신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존재’인가?”
레비나스는 주어 없는 존재를 ‘일리야(ilya, 프랑스어로 ~이 있다라는 뜻)’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일리야의 고독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스스로 해석한 자기중심의 세계를 만들어도 일리야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하던 레비나스는 마침내 일리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습니다. 바로 ‘타자의 얼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얼굴은 진짜 얼굴이기보다는 타인의 타자성을 의미하는 비유적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낯선 이의 얼굴에 담긴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지구상의 많은 문제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만 바라볼 때 생겨납니다. 고통받는 타인을 마주쳤을 때 우리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마주하는 순간 그와 연관을 맺기 때문입니다. 이미 ‘얼굴’을 봤으니 그를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돕지 않는다 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 셈입니다. 도움의 여부와 상관없이 타인과 연관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레비나스의 타자론>에서

이 무한한 가능성, 즉 자유는 고정되지 않기에 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역할을 지정하여 그 모습에 맞춰 스스로를 꾸며 내기도 하고, 도전보다 안정감을 주는 미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괴롭습니다. 불안정하고 모든 행동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선택지인 갈림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간은 늘 불안을 피하기 위해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불안을 감당하고, 삶을 선택하면서 자신을 계속 미래로 나아가도록 스스로 이끌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는다면: 사르트르의 실존>에서

노화로 인한 변화는 신체적, 사회적, 인지적 한계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실존적 자유는 이러한 한계에 의해 손상되지 않습니다. 보부아르가 말하는 자유는 자신의 관점, 사고, 태도를 결정할 자유입니다. 신체는 늙어가지만, 정신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반응하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보부아르는 개인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노년기에도 당연히 선택의 자유가 있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노화로 인해 나타나는 신체적, 사회적 한계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라고 조언합니다. 이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롭게 나이 들고 싶다면: 보부아르와 노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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