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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한겨레출판

책소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전 편집장이자,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글을 써온 권혁란 작가는 무의미한 고통에 시달리다 느리게 죽어간 엄마의 날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온몸은 보랏빛 반점으로 뒤덮이고 깡마른 뼈와 피부 사이의 한 점 경계 없는 몸으로, 제 발로, 제 손으로 용변조차 볼 수 없어 도우미의 손을 빌려야 했던 엄마의 모습을 진솔하게 써내려간다.

저자는 '늙은 부모'를 모시는 '늙은 자식'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꼬집는다. 백세 시대·장수 시대는 과연 축복인지 재앙인지, 노인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는 이 시대에 노인 부양의 책임이 오롯이 한 가족에게만 있는지 되묻는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의 도움을 받는 자식들에게 '부모를 버리고 패륜을 저지른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시선을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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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존엄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찾아서

1부 봉황의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마지막 2년

엄마는 내 엄마니까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
엄마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야
나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니
내가 잘 때 누가 나를 때리나 봐
한없이 밝은 양성모음으로만
울기만 해봐요, 다신 안 보러 올 거야
사람 머리가 까매야 예쁘지
싸리꽃 한 잎 같은 이빨 하나
영혼의 음료, 뜨거운 믹스커피
빨간 주머니는 노란 밤벌레의 집
터무니없이 착하기만 해
권 안과 선생과 박카스

2부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새벽 1시, 이상한 사설 응급차
응급실에 퍼지는 한 서린 욕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엄마 빤스에는 주머니가 많아서
기로 풍습, 죽음을 나르는 지게
아기 같은 엄마의 아랫도리
굿’바이, Good & Bye
‘밴드’ 속 엄마의 꽃 같은 날들
섬망의 징후, 헛것과 싸우다
이승에서 못다 한 말

3부 새해에 그렇게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지

작별까지 마지막 12일
오늘은, 죽지 말아주세요
“엄마한테 졌다, 손힘이 장사 같아”
정말 저승사자가 오나 보다
보내드릴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
장하다 김봉예, 가엾다 김봉예
꿈처럼 어여 가요, 제발
이제 임종을 기다리지 않겠다
“다 빼주시면 안 돼요?”
이승이여 안녕, 인사도 없이
마침내 피안으로 건너가다
저승꽃, 마지막으로 피는 꽃

4부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었다

장례식장이 유치원처럼 명랑했다
두 나무가 스물아홉 그루로
관도 무덤도 없이 나무 아래로
당신이 남긴 것들
아무렇지도 않게 벚꽃이 날리던 날
‘내 집’에서 ‘짧게’ ‘앓다’가
내 생의 마침표는 내가 찍으려 해
불문곡직, 장례식에 아무도 부르지 마라

5부 엄마 없이, 인생찬가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어딜 가, 국수 먹고 가야지
냉이 속에 숨겨둔 신사임당
엄마가 살던 마지막 집
단톡방 ‘김봉예의 자식들’
절대로 저 딸에게 매달리진 않으리라
아무에게도 엄마를 부탁하지 말아요

에필로그-죽음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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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김민식: 구순 엄마와의 마지막 2년을 섬세하게 기록한 이 책은 언젠가 늙은 부모와 이별을 겪게 될 자식들에게 공부가 된다. 그 큰 아픔을 직접 몸으로 살아내기 전에, 미리 글로써 채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다. 나는 작가의 글에서 온기를 얻고, 용기를 얻었다. 노년과 죽음을 대비하는 지혜는 덤이다.
김민정: 엄마가 있었는데 엄마가 없게 된 이야기. 엄마 있는 딸이었는데 엄마 없는 딸이 된 이야기. 있다 없음은 쥐었다 편 주먹처럼 우리가 잡아주어야 하는 쓸쓸한 손인데 이상하지, 되레 그 손이 우리의 마음을 쓸어주고 있다 싶은 이야기. 작정할 리 만무했을 텐데 봄볕 같은 따스함이 우리 안에 절로 퍼지고 있구나, 그리하여 등을 펴게 만드는 이야기. 죽음, 거참 누가 차가운 거랬니, 끼고 있던 슬픔이라는 장갑을 벗고 그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게 하는 이야기. (엄마 잃은 딸에게 할 소리는 아닌데, 죄송한데,) 참으로 재미가 있어 술술 읽게 되는 이야기. 특유의 입담과 생생한 묘사로 ‘없는 엄마’가 책만 펼치면 ‘있는 엄마’가 되는 이야기. 그렇게 엄마라는 어미 ‘모’를 영원히 살려놓는 이야기.
한국일보: 한국일보 2020년 1월 31일자 '새책'
한겨레 신문: 한겨레 신문 2020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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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부모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구순 엄마와의 마지막 2년을 담은 에세이

“죽음, 거참 누가 차가운 거랬니,
끼고 있던 슬픔이라는 장갑을 벗고
그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게 하는 이야기”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인의 손길에 목숨을 맡겨야 살 수 있는 존재, 애기와 노인. 여기, “귀엽지도 않은 애기”가 되어버린 구순 엄마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저자가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전 편집장이자,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글을 써온 권혁란 작가는 무의미한 고통에 시달리다 느리게 죽어간 엄마의 날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온몸은 보랏빛 반점으로 뒤덮이고 깡마른 뼈와 피부 사이의 한 점 경계 없는 몸으로, 제 발로, 제 손으로 용변조차 볼 수 없어 도우미의 손을 빌려야 했던 엄마의 모습을 진솔하게 써내려간다.
이 책이 여타의 책들과 다른 점은 단지 사모곡이나 애도의 말들만 담은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여섯 자식이나 두었던 엄마가 왜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늙은 부모’를 모시는 ‘늙은 자식’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꼬집는다. 백세 시대·장수 시대는 과연 축복인지 재앙인지, 노인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는 이 시대에 노인 부양의 책임이 오롯이 한 가족에게만 있는지 되묻는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의 도움을 받는 자식들에게 ‘부모를 버리고 패륜을 저지른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시선을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모가 자식들 집에서 ‘징역살이’ 하듯 사는 것보다 요양 전문 기관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이 자식과 부모 모두에게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모가 아파서 혼자 움직이지 못하고 온몸이 무너져 내리고 까만 반점이 솟아나는 걸 보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자식은 나날이 마음이 널뛴다. 좋은 밥 한 끼를 놓고도, 명랑한 웃음 한 번에도 뒤통수가 당긴다. ‘자식이 이래도 되나? 부모가 아픈데.’ 그리움보다 죄의식과 부담에 목이 아프다. 나날이 삭고 정신마저 혼미해져 자식들 이름조차 헷갈릴 때, “내가 오래 살아 네가 고생이구나” 청승스레 울 때, 그래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홀연 눈을 빛낼 때, 수없는 모든 순간에.(본문7쪽)

매일매일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는 노인들이나 그 노인들을 두고 자기 삶을 사는 자식들이나 누굴 탓할 게 아니었다. 누가 학대할 마음으로 부모를 붙잡아 두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괴롭히려고 숨 쉬고 움직이겠는가. 한 공간에 다른 존재 둘이 갇혀 살다 보면 둘 다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가 존재를 미워하게 되는 것,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상대를 괴롭히게 되는 게 부모 자식 간이라고, 엄마와 딸 사이라도 다를 것은 없다. … 누군가 하나는 온전히 다른 하나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더더욱 힘들 수밖에.(본문30쪽)

“아무에게도 엄마를 부탁하지 말아요”
지혜롭게 노년을 준비하는 법

“살구나무 꽃이 환하게 핀 요양원에
엄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도 자식들 눈에 나이 들어가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뒤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요양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겨져 임종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록했다.
1부에서는 살구나무 꽃이 환하게 핀 요양원에 엄마를 보내게 된 사연과 엄마가 요양원에 입소한 뒤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옆 침대 할머니의 가지런하고 예쁜 틀니를 보고 하나 남은 생니를 뽑아 달라고 떼를 써서 치과에 데리고 갔던 이야기, 엄마가 딸에게 주려고 바지 주머니 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밤을 받아들었다가 오글거리는 밤벌레를 보고 천장까지 던져버린 이야기 등 피로하고 지칠 법한 상황에 공감이 가면서도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올 만한 일화가 가득하다.
2부에서는 요양원과 종합병원을 수차례 왔다 갔다 하는 과정과 섬망의 징후가 찾아온 엄마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도 착해,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괴롭히고 남에게는 모진 말 하나 못 했던 엄마는 죽기 직전 ‘섬망’에 빠진다. 딸자식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을 허공에 대고 하는 대목에서는 인간이 실제 죽음을 맞이할 때,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게 한다.
3부에서는 요양원에서 생활하던 엄마가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기까지의 마지막 시간을 담았다. 숨이 끊어질 듯 말 듯, 열이틀간을 반송장 신세로 천천히 죽어간 엄마를 보며 저자는 생각한다. 당사자의 의사는 제외된 채,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겪는 사람을 누구 하나 죽을 수 있게 돕지 못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관해.
4부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 없고 밋밋하게 살다 돌아가신 엄마를 추억하며 수목장으로 간소하게 치른 장례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남·장손으로 이어지는 봉제사의 고리를 끊어낸 큰오빠와 몇 달 뒤 ‘내 집’에서 ‘짧게’ 앓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가족장으로 치르는 장례를 바라보며 불필요한 장례 문화와 제사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5부에서는 엄마를 떠나보낸 뒤 ‘고아’가 된 마음과, 이제는 보려고 애써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 허청거리게 된 순간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딸들에게는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써두고 엄마가 남긴 옷가지들을 주워 입고 죽음에 관련된 글과 영화만을 보며 엄마 없이, 인생찬가를 부른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을 것이고 우리 부모들을 요양원에 보낼 것이고 우리도 가게 될 것이다. 누구도 생의 마지막과 보살핌을 자식에게만 맡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고 한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단독자로 살아가다 죽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자식들도 천천히 늙을 것이고 우리 세대의 사람들을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것으로 마음을 아프게 앓을 것이다. 부모를 지고 간 지게에 내가 오를 것이고 그 지게를 내 자식이 지게 될 것이고 그 아이 또한 지게를 지게 될 것이다.(본문 121~122쪽)

죽는 건 본인인데 그 죽음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그의 배에서 태어나 그의 젖을 빨아먹고 자란 자식들도 똑같았다. 동의서에 사인하라니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을 뿐 엄마의 죽음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죽어가는 엄마를 사랑한들 사랑하지 않은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리다가 가래를 빼줄 뿐, 입술을 닦아줄 뿐, 일분일초도 그의 몸에 찾아온 아픔이나 고통, 긴급한 과정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본문 201쪽)

“내 생의 마침표는 내가 찍으려고 해”
존엄하고 아름다운 죽음에 관하여

“무슨 미련이 남아 저리도 고통스럽게 살아 계시는 걸까.
엄마는 결국 모질게 살아남아
자식들 고생시키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합병원과 요양병원, 요양원과 호스피스 병원 체계, 우리나라의 사설 응급 체계, 장례 체계, 연명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사전연명치료거부동의서’ 등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꼭 알아두어야 할 정보들과, ‘좋은 죽음’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늙고 병들었을 때 실제로 어떤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는지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저자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좋아질 일이라고는 절대 없을 엄마를 데리고 수술실과 응급실, 집중 치료실, 중환자실, 요양원 등을 전전했다. 그렇게 지난한 고통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엄마를 지켜보며 죽음에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엄마는 쉰 살이 되기 전부터 “늙으면 그냥 딱 죽고 싶다”고 말씀하셨지만, 당신 뜻대로 편히 죽지 못하셨다. 당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연명 치료를 받으며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고통 속에서 모질게 살아계셔야 했다. 저자는 그런 나날들 속에서 절대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고, 늙어서 제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식들에게도,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내 생의 마침표를 내가 찍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먼 미래의 일일 것만 같은 죽음에 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오래 살아서 늙어 죽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자식들 곁에 머무르지 않게, 가슴은 아프지만 곧 잊힐 슬픔과 조금은 달콤할 수 있는 그리움만 주고 떠날 수 있도록, 존엄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방법을 돌아보게 한다. 늙어가는 부모와, 부모의 죽음에 관해 비슷한 경험을 한 독자들에게는 보살핌과 수발의 노고를 나누고, 위로를 전한다. 아직 겪어 보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지혜를 빌려주고, 글로써 미리 채비할 시간을 줄 것이다.

내 몸에, 내 죽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하나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식이 보호자인 나였다. 그 참혹한 두 달 동안 병원을 오가면서 공부를 했다. ‘엄마처럼, 저렇게, 죽지는 않을 거야.’ 하루가 더 지날수록 내가 늙을 것과 아플 것은 자명하고 죽을 것도 명확하니 뭘 더 꺼리겠는가. 아직 정신이 고만고만할 때, 아직 그나마 총기가 있을 때 버릴 것은 버리고, 지울 것은 지우고 도장을 찍을 것은 찍어야 했다. 엄마가 죽는 순간까지 하지 못한 것을 나는 준비하고 싶었다.(본문 257쪽)

사랑을 담아 기억하든 슬픔을 적셔 되새기든, 그냥 이승에서 헤어진 게 아니라 저승으로 하나둘씩 사람들을 보낸 후에는 사랑했든 안 했든 마음이 예전과 달라졌다. 만나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을 거라 알고 있던 때와 보려고 애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의 허청거림은 순간마다 헛발을 딛는 것 같았다.(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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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장례식장에 앉아 있으면 세상 사람이 앓다 죽은 낯선 병명을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맑은 소고기 뭇국, 벌건 육개장을 앞에 두고 당신의 엄마가, 너의 아버지가 무슨 병으로 얼마나 앓다가 돌아가셨는지 묻는 것은 어쩌면 위로의 말이라기보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늙고 아픈 엄마 아버지 상황을 위안하고 싶은 안간힘이기도 했다. 그동안 보살핌의 노고와 수발의 고통을 들어주려고 귀를 빌려주는 시간이기도 했고 부모를 잃은 당사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슬픔의 시간을 하소연할 수 있는 입을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는 노인들이나 그 노인들을 두고 자기 삶을 사는 자식들이나 누굴 탓할 게 아니었다. 누가 학대할 마음으로 부모를 붙잡아 두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괴롭히려고 숨 쉬고 움직이겠는가. 한 공간에 다른 존재 둘이 갇혀 살다 보면 둘 다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가 존재를 미워하게 되는 것,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상대를 괴롭히게 되는 게 부모 자식 간이라고, 엄마와 딸 사이라도 다를 것은 없다.

드디어 엄마의 이름이 불렸다. 반짝 정신이 든 엄마를 부축해 의사 앞에 인도하려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엄마가 굽었던 허리를 쫙 폈다. 양 옆에서 끼지 않으면 잘 걷지도 못하시더니 별안간 뚜벅뚜벅 진료실의 권 선생을 향해 내 손도 뿌리치고 곧장 혼자 걸어가시는 거였다. 황당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연히도, 권 안과 권 선생님은 엄마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특별히 대하지도 않았다. 하루에 100여 명 넘는 환자를 보는 의사가 몇십 년 전 평범한 할머니를 기억할 리 없는 일.

요양원은 병원이 아니므로 의사나 간호사가 상주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제때 먹이는 간호조무사가 출퇴근하는 정도이므로 처방약으로 증세가 낫지 않으면 바로 노인 병동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요양원에 있는 시간과 병원에 머무는 기간이 비슷해졌다. … 요양원은 단지 가정집의 대체 장소다. 치료가 아닌 가료와 요양을 하는 곳이므로 아프면 반드시 병원으로 가야 한다. 집에서 가족이 돌보다가 아프게 되면 병원에 가는 것과 같다. 병원으로 보내지 않으면 방치나 학대한 것이 된다.

평생을 착하게만 산 것 같은 엄마가 불분명한 의식 끝에 남을 욕하면서 그야말로 눈에 이글이글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텅 빈 눈과 분노에 찬 말들이 응급실 구석구석을 저렁저렁 울렸다. 아픈 애기를 안은 여자가, 붕대를 감은 남자가, 황망 중에 찾아온 보호자들이 놀라지도 않고 무심하게 우리 쪽을 돌아봤다. 참혹했다. 이토록 평생을 갉아먹은 남 말의 하찮은 표현 하나와 그것이 들어가 박힌 엄마 마음자리의 깊은 아픔이라니. 엄마는 물기가 없어 자꾸만 목 뒤로 말려들어가는 혀로 여섯 번을 반복해 박혀 있는 칼 같은 말을 빼내고 있었다. ‘섬망’이었다.

겨우겨우 긁어 올린 효심으로 하루이틀 엄마, 엄마 울며불며 옆에 앉아 있다가 훌쩍 가는 자식 말고 정확한 사람이 필요했다. 제대로 돈을 받고 엄마를 챙겨줄 프로 간병인, 프로 요양사, 프로 영양사가 필요했다.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동문서답으로 몇 시간을 보낸다 해도 옆에서 떠들어줄 동년배 할머니 친구들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아프면 업고 가다 쓰러지는 늙은 자식 말고 들것에라도 신속하게 싣고 가줄 튼튼한 사람이 있는 곳, 그런 곳으로 가야 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내 발로 걸어가 내 손으로 용변을 처리하다 세상 떠나는 것이 엄마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수치심과 미안한 감정이 쟁쟁하게 살아 있는 정신으로 움직일 수 없는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천장에 시선을 두고 내 몸이 아닌 양 거리를 둔 엄마의 모습은 무참하고 슬펐다. 내가 딸을 키울 때처럼 엄마의 두 다리는 하늘로 들려지고 사이사이에 낀 변을 닦느라 아랫도리가 드러나고야 말았는데, 생전 처음이었다. 언제 엄마의 아랫도리를 그렇게 훤하게 볼 수 있었으랴. 엄마의 거기는 갓 태어난 여아처럼 무구하고 무방비했다.

생명은, 그냥 ‘꼴까닥, 뚜우’ 하고 끊기는 게 아니다. 서서히 왔다 갔다 들어갔다 나왔다,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 병실은 이제 임종의 방이 될 것이다. 엄마 다리 왼쪽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다. 나무토막을, 바싹 마른 장작을 만져봐서 안다. 갈라진 무늬나 질감마저 온도마저 정말로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딱딱하다. 부드러운 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다 흘러내려서 더더욱. 손은 부었다 식었다, 가라앉으며 천천히 소멸을 향해 마지막 항해 중이다. 자는 듯이 죽었다는 게, 돌연히 죽었다는 게 축복인 것을 온전히 알겠다.

나라도, 저렇게, 죽지는 말아야지.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밀린 잠에 빠지면서도 이를 앙다물고 각오를 다졌다. 아들이, 딸들이, 수없이 오고 가고 교대하고 손을 만져도 아무것도 모르고, 몸 안의 모든 것을 다 빼내고, 쏟아내고, 다 썩어갈 때까지 임종도 못 하는 그런 가혹한 마지막 날들을 살지는 말아야지. 어딘지,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화가 막 솟구쳤다.

환자는 살아 있는 동안, 매일 그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배가 부를 만큼 진통제를 수십 알씩 먹고 팔뚝이나 손등이 새파래질 때까지 주사를 맞아야 한다. 목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밥물을 위로 집어넣어야 한다. 오줌이 관을 통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고 똥은 막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환자 본인의 고통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거나 안 받게 하려면 엄청난 죄책감에 빠진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닐까.’ ‘살 수도 있을 텐데 성급하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이별의 고통도 작별의 아픔도 아직은 경험해본 적 없는 그늘 적은 딸들이니 다행이었다. 나를 부탁하지 않아도 되어서, 애들이 엄마를 어디에 부탁할 생각조차 없이 투명하니 맑아서 차라리 좋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영어로 ‘Advanced Medical Directives’였다. 미리 인생의 마지막을 부탁하는 의학적 방향. 선명하게 정확해서 큰 보험 하나 들어둔 것처럼 뒷배가 든든하다. 이제 조금만 더 정리하면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된다.

‘없어서 그래. 없어져서 그래. 있다가 사라져서 그래.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그래.’ 그런 날들이 자꾸자꾸 살아지면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또 처음으로 아주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살려면 생기를 찾아가야 하잖아, 왜 기를 쓰고 시들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기운만 찾게 될까. 사람이 만나 눈이 맞고 떨면서 사랑을 시작하거나 환하게 웃는 이야기는 소설이든 시든 영화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러다 죽을 것을’ ‘저러다 헤어질 것을’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들 애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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